파토스의 시
박 찬 일(시인․연세대 강사)
시는 오로지 격정이다 ― 바이런
시는 어차피 이상주의자의 길에 피는 꽃이다. 억지로 만드는 데서 벗어나 좀 더 자연스러워지면서, 잃어버린 절규성을 회복하고, 왜소해짐으로써 놓친 큰 울림을 되찾는다는 일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우리 시가 한 번 시도해볼 일이다.
― 신경림, 「오늘의 시, 내일의 시」
예술은 만드는 것이다, 라는 로댕의 입장을, 또한 로댕의 영향을 받은 릴케의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재봉선(“바느질 자국”)이 드러나는 시가 아닌, 가꾼 시가 아닌, “자연스러”운 시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표현은 시의 본령이 “절규성”의 시라고 한 것이다. “절규성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절규성의 시는 다른 말로 하면 격정의 시이다. 격정이 시의 본령이었다는 것. 격정적으로 표현하는 시는 또한 ‘쉽게’ 표현하는 시이다.
2
그리스 수사학에서 에토스는 청중을 사로잡기 위해 변론가가 나타내야 하는 성격이다. 변론가는 “분별 있고 진지하며 호감이 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변론가의 ‘자기비하’(비하법)나 유머가 이런 것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파토스는 변론가가 청중에게 야기하는 감정들의 총합이다. ‘재판 담화’(검사의 말, 변호사의 말 등)에서는 청중에게 “분개나 동정”을, 정치 담화(정치가의 연설)에서는 “두려움이나 희망”을, 과시적 담화에서는 “멸시나 감탄”을 자아내야 한다. 전부 수사학의 목표인 ‘설득’과 관계 있다.
그리스어 파토스Pathos의 우리말 번역은 ‘격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격정은 동정과 공포였다. 관객이 동정과 공포들[격정들]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이 격정들을 순화시키려는 것이 비극의 목표였다. 다른 말로 하면 격정을 배설시키게 하는 것이 비극의 목표였다. 격정의 순화, 격정의 배설이 바로 정화Katharsis였다. 비극은 격정의 비극이었다.
‘
담화’가 목표로 하는 ‘청중의 격정’과 비극이 야기하는 ‘관객의 격정’은 모두 수용미학적 격정이다. 수신자의 격정이다. 수용미학적 격정, 수신자의 격정이 있으면 창작미학적 격정이 있다. 발신자의 격정이 있다. 사실 그동안의 격정의 문학사에서 논의의 중심은 수용문학상의 격정이 아니라, 창작미학상의 격정이었다. 격정은 보통 창작미학상의 격정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창작미학상의 격정과 수용미학상의 격정은 동전의 앞뒤이다. 창작미학상의 격정이 동전의 앞이고 수용미학상의 격정이 동전의 뒤이다. 창작미학상의 격정이 수용미학상의 격정을 낳는다. 발신자의 격정이 수신자의 격정을 낳는다. 아이러니, 역설, 은유, 상징, 알레고리 등은 파토스를 전달하지 않는다. 파토스가 파토스를 전달한다. 아이러니, 역설, 은유, 상징, 알레고리 등이 파토스를 전달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전달은 직접적인 전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달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낯설게 하기’의 전달이기 때문이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이육사, 「절정」)는 파토스를 전달하지 않는다. 직접적인 전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달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낯설게 하기의 전달이기 때문이다. 파토스가 파토스를 전달한다는 것은 파토스는 직접적인 전달이기 때문이다. 전달에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낯설게 하기의 전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고갈한 반백의 사나이를 당신은 울게 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읽어 가며 내가 흘렸던
엄청난 눈물들을 염주처럼 알알이 잇는다면
나는 아마 평생을 두고도 못 다 헤아리리.
― 박희진, 「오오 도스토예프스키」
동정과 공포의 시이다. 아니,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을 읽었을 때의 동정과 공포를 일깨우는 시이다. 격정을 일깨우는 시이다. 격정의 표현 중 “오오”라고 시작하는 것만한 것이 있는가. “눈물”만한 것이 있는가. “눈물들을 염주처럼” 이으면 “평생을 두고도 못 다 헤아”릴 것이라고 과장하고 있다. 영탄하고 있다. 과장과 영탄은 격정의 범주이다. 창작미학상의 격정이 수용미학상의 격정을 수반하였다.
신정론(神正論)의 입장은 신은 정의롭다는 입장이다. 신이 정의롭다면 어째서 인간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허용하는가, 선한 인간이 괴로움을 받게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보다 높은 선에 도달하기 위해 신은 악을 허용하고 있다고 대답하는 입장이다. 신을 변호하는 입장이다. 변신론(辯神論)의 입장이다. 신정론의 입장은 그러나, 신이 정의롭다면 어째서 인간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허용하는가, 선한 인간이 괴로움을 받게 하는가, 라는 질문을 계속 낳게 하는 입장이다. 악이 계속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악의 역사가 계속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정론의 입장은 역설적으로 신을 반박하게 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카라마조프가의 아버지 표도르, 금욕적인 막내아들 알료샤, 지성적인 무정부주의자 둘째 아들 이반, 책임감이 투철한 반면 성급한 성격의 장남 드미트리, 수도사 조시마, 세속적인 그루셍카 등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다양하게 대변하는 인물들을 통해 선과 악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있다. ‘신정론’ 문제와 대면하고 있다. 선과 악에는 우직/교활, 순결/음란 등의 코드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 격정의 시 중 신정론 문제 만한 것이 없다. 신을 찬양하는 것, 신을 부정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 다윗의 시편들은 신정론의 시이다. 신은 정의롭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시이다. 신을 찬양하는 시이다. 그러나 신에게 탄식하는 시이기도 하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 「시편」 23편
3
‘격정의 시’의 기원은 그리스의 핀다로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영웅 찬가는 격정의 양식이었다. 그리스 비극들도 격정의 언어였다. 동정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언어였다. 로마의 호라츠, 18세기 독일의 클롭슈토크, 19세기 독일의 횔더린도 격정의 찬가를 썼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프랑스의 의고전주의 극들도 격정의 언어였다. 격정의 비극이었다. 바로크 문학도 격정의 문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세기 말 쉴러의 드라마와 시들이 격정의 언어였다.
자유 그리고 평등!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있던 시민이 무기를 들고
거리에는 큰 소리들로 가득 찼다.
학살자의 무리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
성스러움이 사라졌다. 모든
경건한 두려움의 속박은 사라졌다
선한 자는 악한 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도든 악덕들이 자유롭게 활보한다.
위험한 것은 사자를 깨우는 일,
호랑이의 이빨은 치명적,
그러나 끔찍한 것 중에 끔찍한 것은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이도다.
― 쉴러, 「종의 노래」(1799)
“자유 그리고 평등”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다. 그러나 혁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폭력화(?)되었다. 폭력을 위한 폭력이 만연하였다. 쉴러는 이러한 혁명의 이면을 격정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혁명에 참가한 시민들을 “학살자의 무리”로 표현하였다.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이라고 하였다. 혁명을 “악”의 혁명이라고 하고 있다. “성스러움”, “경건한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신성가침의 영역으로 되면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금기의 영역들이 모두 빗장을 열고 나왔기 때문이다 “모든 악덕들”이 빗장을 열고 나왔기 때문이다. 수용미학적으로는 ‘분개와 동정’ 중에서 분개의 파토스를, ‘두려움과 희망’ 중에서 두려움의 파토스를 일깨우고 있다. 예를 들면 “학살자의 무리들”에 대한 분개이고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다.
낭만주의에 와서 파토스는 거부되었다. 환상, 꿈, 상상의 범주와 파토스는 양립하기 힘들었다. 낭만주의자들은 파토스 대신 아이러니를 선호하였다 사실주의, 자연주의 시대에 격정은 아류적인 것, 저급한 양식으로 폄하되었다. 파토스는 ‘사실’의 양식이 아니었다. ‘자연’의 양식이 아니었다. 파토스의 양식을 다시 일깨운 것은 니체였다. 니체에게 파토스는 노예의 양식이 아닌 귀족의 양식이었다. ‘노예’는 신의 부재를 견딜 수 없는 자이고 ‘귀족’은(혹은 위버벤쉬는) 신의 부재를 견딜 수 있는 자이다. 신의 부재를 견딜 수 있는 자의 시는 파토스의 시이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자의 시는 파토스의 시이다. 기꺼이 몰락해주겠다는 자의 시는 파토스의 시이다.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격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기꺼이 몰락해 주겠다, 라고 말하는 것은 격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격정의 언어들로 채워졌다.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내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참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클롭슈토크, 횔더린, 쉴러, 니체에게 격정은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표현주의에 와서 격정은 시대적인 양식이 되었다. 표현주의는 절규의 양식이었다.
표현주의 문학의 주제는 ‘새로운 인간에 대한 요구’였다. 세기말의 가히 가위눌림의 상황,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문학적 응전으로서 새로운 인간에 대한 요구였다. 새로운 인간에 대한 절규였다. 절규의 시는 명사 위주의 시이다. 명사, 혹은 명사구가 마치 스타카토식으로 펼쳐진다. 스타카토식으로 읽힌다.
4.
정치시, 특히 선전 선동시들이 격정의 시이다. 하이네(1797~1856)는 정치시의 원조이다. 노동자 시의 원조이다. 정치시는 사회의 변혁을 목적으로 한다. 전복을 목적으로 한다. 다음은 하이네의 「쉴레지엔의 직조공들」(1844)이다. 총 5연 중 앞의 3연이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짜는 중.
수의에 세 겹의 저주를 짠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하나의 저주는 하나님에게. 우리는
추운 겨울에 굶주리면서 기도했으나
헛된 희망, 헛된 기다림이었다.
그는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놀렸도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하나의 저주는 왕에게. 부자들의 왕에게.
그는 우리들의 극빈을 외면했다.
우리의 마지막 몇 푼까지 긁어갔다.
그리고 우리를 개처럼 쏘아 죽이라고 한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실제 쉴레지엔 지방에서 직조공 봉기가 있었다.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많은 직조공들이 죽거나 다쳤다. “세 겹의 저주”는 “하나님”, “왕”, 그리고 “조국”에 대한 저주이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은 성직자들을 저주하는 것이고, 왕은 “부자들의 왕”이므로 왕을 저주하는 것은 부자들을 저주하는 것이다. 봉건주의 시대에 각각 ‘정신적 후견인’ 및 ‘세속적 후견인’이었던 성직자와 귀족은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 성직자와 자본가로 바뀌었다. 봉건주의 시대에 성직자와 귀족들이 결탁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시대에도 성직자와 자본가들이 결탁하였다. 기독교는 봉건주의 체제 및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성직자는 노동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설교하였다. ‘분개와 동정’ 중 분개의 파토스를 일깨우고 있다. ‘노래성’이 격정을 강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가 노래의 후렴구처럼 반복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분개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다. 다음 김남주의 「낫」도 노동자 시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노동자 농민의 나라’를 꿈꾸는 정치적 전복의 시로 읽을 수 있다.
낫 놓고 ㄱ 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주인”과 “종”은 각각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혹은 배운 자와 못 배운 자를 제유하였다. 주인은 “낫 놓고 ㄱ 자”를 아는 자이고 종은 “낫 놓고 ㄱ 자”를 모르는 자이다. 언어는 담담한 어조이지만 내용은 격정적이다. 셋째 행 끝에서 “~더라”라고 하는 것은 담담한 어조이다. 객관적 보고의 어조이다. 객관적 보고의 어조는 격정과 거리가 멀다. 내용이 격정적이라고 하는 것은 “종이” “낫으로” “주인의 목을 베”기 때문이다. 충격적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충격적으로 계급 혁명을 선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가, 즉 객관적 보고의 어조와 충격적 내용이, ‘선동’에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충격적 내용을 ‘나지막하게’ 말할 때 충격적 내용이 더욱 충격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나지막하게 살인을 명령하는 것이 큰 소리로 살인을 명령하는 것보다 더 위압적이다.
노동자 시의 전형은 박노해가 보여주었다. 『노동의 새벽』에 실린 「손무덤」의 마지막 연이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 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분개와 동정’의 파토스 중 분개와 동정 둘 다를, ‘두려움과 희망’의 파토스 중 두려움과 희망 둘 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누런 착취의 손”에 대한 분개이고, 손을 잘린 “정형”에 대한 동정이다. “일 안하고 놀고 먹는 하얀 손들을” “프레스로 싹둑싹둑” 자르겠다고 하는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난다고 하는 것은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에 호소하는 선전 선동시의 모범적 예이다.
5
그리고 사랑의 시들이 있다. 사랑의 시들도 대부분 파토스의 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파토스를 담고 있는 시들, 파토스를 불러일으키는 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문제는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이다. “곡조”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곡조를 넘어서는 “사랑의 노래”인데 곡조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곡조가 사랑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곡조 이상이라는 것이다. 곡조에 갇힌 격정이 보인다. 사랑의 격정이 보인다. 사랑의 격정이 일렁이고 있다. 곡조가 방파제처럼 막고 있다. 곡조라는 형식이 막고 있다. 터져 나가는 내용을 형식이 막고 있다. 막고 있어도 이 시가 평온한 사랑의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격렬함을 감추었다고 해서, 곡조가 막았다고 해서, 평온한 사랑의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곡조 속에 감추어진, 형식 속에 감추어진, 사랑의 격정이 더 격한 사랑의 격정으로 보인다. 노출된 사랑의 격정보다 노출되지 않은 사랑의 격정이 더 격한 격정으로 보인다. 노출된 격정은 격정일 뿐이지만 노출되지 않은 격정은, 숨겨진 격정이므로, 답답한 격정이므로, 더 심한 격정으로 보인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곡조에 갇혀 있는 사랑의 노래이므로 밖에서는 들을 수 없는 사랑의 노래이다. 곡조 밖에서 보면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사랑의 주체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고 사랑의 객체는, “님”은, “침묵”이다. 주체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객체의 ‘침묵’이 서로 조응하고 있다. 소리 없는 아우성과 침묵이 서로 조응함으로써 소리 없는 아우성은 두 배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사랑의 성마름’(혹은 사랑의 갈증)이 두 배로 커져서 사랑의 노래가 곡조를 뚫고 나올 것 같다. 성마름이 두 배로 커져서 독서자의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님의 침묵」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격정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다.
아이러니의 시는 격정의 시가 아니다. 그러나 다음의 시를 격정의 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다음의 아이러니의 시를 격정의 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김소월, 「진달래꽃」
아이러니의 시이다. 반대로 얘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고 한 자는 눈물을 펑펑 쏟고 있는 자이다. “진달래꽃/아름 따라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라고 한 것도 아이러니의 표현이다. 환송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력하게 붙들고 싶은 마음을 반대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고이 보내지 않겠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와 같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날 거라는 마음이 들어가 있다.
이 시에서의 격정과 아이러니는 동전의 양면이다. 반대로 얘기했지만 언술의 의도는 같기 때문이다. 마음을 밖으로 직접 표출하기보다 안에서 타게 하는 내연(內燃)의 시도 격정의 시이다. 「진달래꽃」의 아이러니는 내연의 아이러니이다.
「진달래꽃」은 아이러니도 격정의 아이러니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랑과 증오가 동전의 양면이라면 「진달래꽃」을 증오의 시로 읽을 수 있다. 증오의 파토스의 시로 읽을 수 있다. 이를 앙 다물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보인다. 증오하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보인다.
파토스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에는 또한 노래를 회복해야 한다는 뜻도 들어가 있다. ‘노래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래가 ‘더 잘’ 전달하기 때문이다. 서양시의 경우, 노래성은 율격, 각운, 연 형식, 모음운, 자음운 등으로 나타났었다. 우리 시의 경우, 노래성은 주로 3․4조, 혹은 4․4조의 2음보, 3음보, 4음보 형식 혹은 7․5조의 가락들이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7․5조의 가락을 살린 노래였다. 다윗의 시편들은 노래의 시였다. 다윗은 하프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다윗은 시인이면서 가수이면서 연주자였다. 우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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