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1147년에 태어나 1198년 정월에 다리 구경을 나갔다가
낙마(落馬)한 것이 원인이 되어
다음해 1199년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 요리토모가
일본의 역사와 국민성에 남긴 족적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요리토모 최대의 업적은
처음으로 막부(幕府)를 열어(1192)
무가(武家)정권의 기초를 확립한 것인데,
그는 이 과정에서 실로 교묘한 방책을 발명한다.
즉
나라 시대(奈良時代- 기원후 710~784)부터 존속되어 온
율령제를 유지하면서
무가 정치를 전국적으로 전개하는
'권력기구의 이중구조'를 창안해 낸 것이다.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세이이타이 쇼군)으로서
가마쿠라(鎌倉)막부 를 창설하고
일본의 지배권을 한 손에 거머쥔 역사적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요리토모가 취임한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세이이타이 쇼군)이란 무엇이며
그가 열었던 막부(幕府-바쿠후)란 또 무엇인가.
어떠한 관점에서
어떤 사람으로부터 어떤 권한을 부여받았는가,
그러기 위한 의식이나 입법은 어떻게 행해졌는가.
요리토모의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알아본다.
요리토모가
<가마쿠라(鎌倉- Kamakura- 가마쿠라 막부가 있었던 도시)>에
연 막부(幕府)는
조직이나 기능이 에도 시대(江戶- 기원후 1603-1867)의
도쿠가와 막부와는
조직이나 기능이 전혀 다르다.
권력의 원천도
통치의 구조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크게 달랐다.
요리토모는
그 때까지의 역사에는 전례가 없는,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자면 이해하기 힘든
'기묘한 정권'을 만들어 낸 것이다.
바로 거기에
이 사나이 요리토모의 무서운 독창력이 감추어져 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기원후 794- 1192)의 초기는
나라 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율령 국가 체제,
즉 천황(天皇)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 체제였지만,
그것이 점차로 붕괴되어 중기에 이르면
귀족(貴族)이 각각의 장원(莊園)을 통치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나라 시대(奈良時代) 의 율령 국가 체제는
중국의 당 왕조(唐王朝) 체제를 그대로 이식한 것이다.
그 때문에
잘 다듬어진 중앙 집권 제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른바 '
이관팔성(二官八省)'이다.
제도로서 잘 짜여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제도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동시에 반전수수법(班田收授法)도 행해졌다.
이것은
모든 경지(耕地l)를 정부가 소유 관리하면서
농민들에게 일정한 토지를 대여해 주는 형식이다.
이것이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 이르러 점차로 무너지면서
이른바 장원제가 생겨났고
그 장원을 소유하는 귀족의 지배권이 강화되어 갔다.
그 결과
귀족의 영지인 장원에 대하여
정부가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는
이른바
지방 분권 구조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는 귀족의 관점에서 보면
무사(武士)란 하층계급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힘이 강해져
귀족에게 갈 세금을 착복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시작한다. 오랜 세월 동안
귀족들은 무사(武士)끼리의 싸움을 이용하여
세력의 균형을 취하고 권위를 지켜 왔지만,
헤이안 말기에 이르면
많은 무사(武士)들을 거느리는
'무사(武士)의 동량(棟梁)'이 나타난다.
그들이 바로
겐지(源氏)이며 헤이케(平家)이다.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태어난 1147년은
마침 무사(武士)끼리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는 귀족들로 큰 전쟁이 많았던
동란기였다.
즉 무사(武士)는 귀족을 장식품으로 삼고
귀족(貴族)은 무사(武士)를 실전 부대로 이용한 것이다.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세이와 겐지(淸和源氏)의 적류(嫡流)이다.
세이와 천황(淸和 天皇)의 아들이 적(嫡)으로 옮겨서
미나모토라는 성(姓)을 사용한 것이 세이와 겐지인데,
무사(武士) 가운데서는 가장 품격이 높은 가문이며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그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요리토모가 13세가 되는 1159년에
헤이지(平治)의 난이 일어나고
요리토모의 아버지
요시토모는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에게 패배하고 만다.
요리토모는 포로가 되어
교토(京都)로 이송되어 목이 달아날 즈음
다이라노 다다모리(平忠盛:기요모리의 아버지)의
후처(後妻)였던
이케노젠니의 노력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는 이즈(伊豆)로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33세가 될 때까지
헤이케의 이즈 지방관의 관리 하에 있으면서도
잠시도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훗날 가마쿠라(幕府)라는 시골에서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그때부터 발휘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헤이지의 난으로
기요모리가 실권을 잡으면서
그때까지 비천한 존재로 취급받던 무사 계급이
표면으로 부상하여
정치에도 무사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되게 되었다.
헤이케 모노가타리
(平家物語- 헤이케 가문의 일본 서사시) 의 전성기가
10년정도 계속될 무렵인
1180년 전후로
일본 전역에서 기근(飢饉- 굶주림)이 발생한다.
이 대기근(굶주림)을 계기로
헤이케의 지배권에 대한 반감이 널리 퍼져 나가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반(反) 헤이케의 군대(軍隊)를 일으킨 것도
그런 반란중의 하나일 뿐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1180년 4월에 모치히토(以仁)왕으로부터
헤이케 토벌의
밀명을 받은 요리토모는 8월에 들어
이즈에서 반란을 일으키지만
사가미(相模)의
이시바시 산(石橋山:현재의 가나가와 현 오다와라 시)의
전투에서
오바 가게치카등의 헤이케 세력에게 패배하고 만다.
포로가 될 위기일발의 순간에
스기야마의 동굴에 숨어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다음날
이 동굴에도 헤이케의 군대의 손이 뻗쳐
다시 포로가 될 위기에 처했지만
헤이케 쪽의 가지와라 가게토키의 온정으로 목숨을 구했다.
이 장면은 후세의 연극에도 자주 등장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요리토모는
해로를 타고
아와(安房:현재의 지바 현)로 몸을 피해
그 땅을 동부지방 제압의 출발점으로 삼아
가즈사, 시모우사의 대영주인
미우라(三浦)씨의 원조를 받아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는 사이
기근(굶주림)에 의한 사회불만이 고조되어
헤이케가 거느리고 있던 하급무사 집단이 붕괴하고 만다.
요리토모가 공략하던 그 해 10월
후지카와(福士川)의 전투가 있었다.
요리토모는
후지카와 전투에서 이겼지만
그 다음은 별로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
헤이케 토벌을 주로 행한 사람은
미나모토 요시나카였다.
(헤이케로서는
1181년 기요모리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이었다.)
기소(木會)에서 성장한 요시나카는
구리가라(俱利伽羅)고개의 전투에서
케이케 군을 격파하고
호쿠리쿠를 돌아 교토를 쳐서
기요모리가 없는 헤이케 군단을 몰아내고
1184년에 정이대장군에 취임하였다.
교토의 지배권을 얻어
'아사히(朝日) 쇼군,
(세력이 융성하여 아침해와 같다고 붙여진 별명)이라
불려질 정도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귀족 계급을 보전하려는 교토 세력과 대립하면서
병사들의 폭거도 격렬했다.
아마도 요시나카의 병사들도
기근(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1183년 10월,
요리토모에 대해 동국(東國)의 통치권과
군사지배권을 하사한다는 왕명이 내려졌고
여기에 반발한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법황(法皇)>을 유폐시켜 버린다.
이 때문에
요리토모에게 요시나카 토벌의 밀명이 떨어졌다.
밀명을 받은 요리토모는
동생 노리요리와 요시쓰네를
요시나카 토벌군으로 파견하였다.
요시쓰네는
우지가와(宇治川)의 전투에서
요시나카를 격퇴하고 개선하였으며,
이어서 이치노타니(현재의 효고현 고베 시)에 있던
헤이케를 토벌하고
1년여 사이에 단노우라까지 밀어붙여 전멸시켜 버렸다.
이렇게 하여
겐페이 전쟁은 막을 내리고
겐지의 <군사 독재 체제>가 출현하는 것이다.
그 사이 요리토모는
가마쿠라에 가만히 앉아
동부 지역의 지배권 확립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같은 겐지이면서
요리토모로부터 독립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사다케 씨(佐竹氏)의 주변(현재의 이바라키 현)을 평정하고
동남부 일대에까지 지배권을 넓혔다.
그 �문에
요리토모의 생에에는
요시쓰네와 같은 화려한 무용담은 없다.
천하를 평정한 무인으로서는 희귀한 일이다.
요시쓰네는
미나모토 요시나카를 정벌하고
교토를 장악한 다음
헤이케를 괴멸시키고 서해의 끝까지 정복했지만
그후로
요시쓰네와 요리토모의 관계가
또는 고시라카 법황과의 관계가 나빠진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요리토모는 다시 토벌군을 보내 동생을 죽인다.
요리토모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즉각 무력을 동원하여 사실상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다.
실로 현명한 권력자이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방법은 아니다.
요리토모는
1190년에 비로소 고시라카 법황과 대면하여
<곤다이나곤-우근위대장>이 되었다.
그런데 다음해 그는
이러한 직위를 모두 버리고 만다.
율령제 속에서는
아무런 직책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1192년 7월에
드디어
정이대장군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가마쿠라에 막부를 개설한다.
1185년에
단노우라에서 다이라씨를 완전히 무찌르고도
요리토모는 교토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천황과 귀족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진정한 무사정치를 펴기 위해서였다.
즉 교토에서는
여전히 율령체제하에 천황과 귀족이 중심이 되는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것이었고,
실제로 정치는
가마쿠라에 근거지를 둔 막부가 실권을 쥐었다.
가마쿠라 시대는
고대국가 세력의 후퇴와
무사 세력의 성장으로 발생한 이원적 지배형태가
차츰 무사에 의한 일원적 지배 형태로
이행해 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막부 체제에서는
요리토모의 가신이 된 무사들을
고케닌이라 칭하고
고케닌의 영지를 인정해 주었다.
공적이 있으면 새 영지도 받을 수 있었다.
대신 고케닌에게는
요리토모와 막부를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막부는
크게 무사를 관리하는 곳,
일반 정치를 담당하는 곳,
재판을 담당하는 세 기관으로 나뉘었으며
각각을
사무라이도코로,
만도코로,
몬츄조라 했다.
각 지방국과 장원에는
막부에 충성을 맹세한 무사로 구성되어 치안을 유지하고
막부 반항자를 토벌하던
수호(守護)와 지두(地頭)를 설치하고
고케닌을 임명하였다.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정치제도가 정비된 것이다.
요리토모가
막부를 개설하고 무사 정치의 기강을 확립했지만
그 위업은 3대를 넘지 못했다.
1199년
요리토모가 죽고
장남인 요리이에가 2대 장군이 되었으나
호조씨에 의해 피살된다.
동생인 사네토모(實朝)가 3대 장군이 되지만
역시 어리고 병약하여
요리토모의 위업을 이을 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결국 그도
1219년 쓰루가하치만궁에 참배하러 갔다가
조카에게 피살됨으로써
미나모토씨는 겨우 3대로 끝난 것이다.
남은 사람은
요리토모의 아내인 호조 마사코 뿐이다.
남편이 죽은 뒤 마사코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지만,
교토 귀족의 막부 타도 움직임으로
막부가 위험에 직면하자 정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고도바 상황을 중심으로
막부 타도 움직임이 일면서,
전국 무사를 회유하라는 상황의 명령이 내려
무사들은 어느쪽을 따라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이때
무사들을 모아 놓고
눈물로 단결을 호소한 이가 바로
비구니(比丘尼) 마사코 였다.
마사코는
요리토모가 막부를 개설하여
무사들의 지위를 향상했고 영지를 하사한 점을 강조하고,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면
바로 지금이 막부를 위해 충성할 때이니
막부를 위해 싸워 달라고 호소했다.
이 말에 고무된 무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교토로 진격했다.
이때가 1221년이며 이를 승구(承久)의 난이라 한다.
승구의 난을 계기로
조정 관료의 힘은 약하되고
완전한 무사의 세상이 도래했다.
막부는 3000개나 되는 귀족의 장원을 몰수하여
무사에게 나눠 주고,
무사 장치를 더욱 강화했으며
호조씨가 막부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물론 명실상부한 무사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200년 후의 일이지만,
무사정부인 막부가 설치되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요리토모는
'대보율령(大寶律令)'의 조문에 규정된 관직이 아니라
동부군 총사령관(정이대장군)이라는
'영외관'의 지위로 전국의 '무사의 동량'이라 칭하며
정치를 행하는 비 정상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그리고 그 권력을
마사코는 한걸음 더 발전시켜
권력을 쇼군의 바로 아래 내무장관격인 싯켄에게 옮겼다.
일단 이런 구조가 만들어지자
그 동부군 총사령관 직에 두 살짜리 양자를 앉혀
형식화해 버리고,
내무장관격인 싯켄이 실권을 장악하는 구조도
간단히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러한 구조가 가능한 분위기를 만든 것은
바로 요리토모 자신이다.
이것이 훗날의
일본 역사에 영향을 끼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장관보다도
사무차관이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전통이 생겨난 것이다.
정부 관청 기구뿐만이 아니다.
기업에서도 사장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실권은 전무에게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돈다.
아니,
전무보다도 비서실장이라고 말해도
아무도 의아해하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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